야참
밤 열 한 시. 집안 불을 모두 끄고, 스탠드만 달랑 켜고, 맥주를 하나 까고, 시마다 소지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맥주가 비어가고, 담배가 자꾸 눈에 들어온다. 탐정 소설을 읽는데 담배가 없으면 무슨 맛... 집 밖 계단으로 나와 담배를 물고 희미하게 올라가는 연기를 보자니, 그 연기가 흩어 가리려 하고 있는, 하지만 그 뒤에서 광기를 휘두르며 밝게 빛나는 보름달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이 대보름이구나. 멀리 사거리의 신호등 색깔이 시간에 맞춰 몇 번 바뀌고, 타 들어간 담배 끝은 쓸데없이.... 배고프다. --- 생라면을 스프에 찍어먹으려고 찬장을 뒤지는데, 서울와 직장 생활 시작하고 혼자 살때 거의 매일 저녁 밥 대신 소주와 순대와 생라면 먹던 게 생각나서 울컥 감성이 터진다. 중3때 치유했다고 자부한 중2병마져 다시 돋는 이 밤에 그 딴 걸 먹을 수야 없지. 냉장고를 뒤져 보니 유통기한이 1년 지난 카레 가루가 있다. 우리집 냉장고에는 이런 게 많아서 가끔은 발효음식 저장 전문 장독대 같다는 생각도 든다. 카레는 발효되지 않고 곰팡이가 피거나 썩는 거겠지만, 암튼 일단 저 카레 가루를 내 뱃 속으로 치우자. 감자를 하나 까서 썰고, 그저께 먹다 남은 삼겹살 구워 놓은 걸 가위로 좀 작게 잘라서 감자와 같이 후라이팬에 넣고, 후추로만 밑간을 해서 가스 불 위에 얹었다. 감자가 겉만 대충 익을 즈음에 양파와 마늘, 고추 썰어 둔 것을 넣고 잠깐 뒤적인 후 물과 우유를 넣고 끓였다. 보글보글 끓을 때 카레 가루를 풀고, 가스 불을 조금 줄이고, 유통기간이 6개월 지난 치즈 가루를 많이 넣으면 먹고 죽을까봐 조금만 뿌린 뒤 나무 수저로 휘휘 저었다. 물이 쫄아 들기를 기다리면서 식빵에 마가린을 발라 전자렌지에 잠깐 돌리고 맥주를 한 캔 더 따서 목구멍에 부었다. --- 카레는 적당히 쫄아서 끈적이고, 빵은 아직 따듯하고. 빵을 뜯어 카레에 찍어서 몇 번 먹는 동안 배가 불러 버렸다.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