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erdeen Angus (1)


봄인데도, 날씨가 춥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기상 관측이래 최초라는 얘기도 들은 것 같다.
4월인데 눈이 날렸다.
눈 내린 4월 날씨처럼, 내 속도 을씨년스럽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라 그런 지도 모르겠다.
인사철도 아닌데, 해고 통보. 정확히는 보직 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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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는 술렁이는 2월을 뜨겁게 지내고, 3월 첫째 주에 인사 발령을 낸다. 7월 휴가 기간 전에는 이사급 이상의 인사가 있고, 낙하산들은 주로 연말에 날개를 편다. 4월의 인사 발령은, 10년째 이 회사를 다니고 있는 나에게는 생경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 없어 GM의 방으로 숨차게 뛰어 올라 갔지만, 참 좋은 타이밍에 해외 출장 중, 다시 숨차게 내려간 총무부에선 인사과 부장은 친절하게 자기 달력 "휴가 중입니다."로 넘겨 놓았다. 그럼 도대체 누가 인사발령을 한 것일까

속한 부서의 부장에게 찾아 갔더니만, 어디 가서 담배나 한 대 피자고 하는데 영 눈치가 이상하다.
회사 앞에 있는 쓰레기통 옆에서 담배를 물고 하늘을 보니, 뭔가 내리는 게 눈이다. 싸래기도 아닌 함박눈. 인사철도 아닌데 인사발령을 받은 나와, 겨울철이 아닌데 오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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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와 입으로 동시에 연기를 내뿜으며 부장이 뭔가 말을 하는데 어지러운 맘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정리 하면", "그게 뭐..." 등의 쓸데 없는 말을 제외하고 들어 보니, Buyer로부터 제품에 하자가 있다고 44만 달러 정도의 claim을 받았는데, 그 책임을 내가 뒤집어 쓰는 모양이다.

-부장님도 아시지만, 그건 하자가 아니라 디테일입니다. 일반 제품에서는 그러한 효과가 나오면 하자라고 할 수 있지만, 이번엔 그 하자를 디테일로 변경해 소비자에게 어필 하자는 것, 그러니까 한마디로 defect effect로 바꾸는 것이었자나요. 제품 기획 프레젠테이션 때부터 사장님까지 보고가 되었고 바이어에게도 동의를 받은 내용인데요? PT끝나고 나서는 사장님도 매우 좋아 하셨자나요.

- 그게최종 선택은 소비자니까. 시장에서의 반응이 영 별로 였나봐. 바이어 사장이 회장에게 직접 전화 했고, 회장은 책임자 문책하라고 사장을 닥달한 모양이야...


어이가 없었다. 담배는 손끝에서 그냥 타 들어만 가고, 눈은 계속 내리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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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무작정 회사를 나와서 운전대를 잡았는데, 막상 갈 곳이 생각나질 않는다. 이 시간 때의 나는 항상 사무실에서 전화나 아웃룩과 씨름하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일단 엑셀 밟고 가는 대로 가 보자 하고 마음 먹었는데,

한참을 가다 정신을 차려 보니... 집 근처다.
나이를 40을 먹고도, 변변한 취미라곤 없다 보니 고작 갈 만한 곳이 집.
참 답 없는 인생이다.



일부러 집에서 좀 멀리 차를 세웠다.

해가 살짝 지려고 하지만 아무래도 집에 가긴 이른 시간이고, 평소 운전하며 출퇴근 하느라 항상 발목만 운동하는 내 몸에 걸음이라는 벌을 주고 싶어지기도 했고, 담배도 피고 싶었고,피워 물은 담배 연기는 하얗고, 담배를 든 손은 시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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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보니 추워서 차로 돌아갈까 하는데, '역전 앞"이라는 하얀 바탕에 검은 색으로 쓴 간판이 보인다. 저렇게 간판을 하는 집만 있다면, 간판집들은 다 굶어 죽겠다 싶다. 굴림체를 저리 크게 쓰니 촌스러움의 극치다. "역전 앞"도 동어 반복이어서 내용과 형식을 모두 채워주는 촌스러운 앙상블에 발이 저릴 정도다. 가까이 가 보니 밑에 "양주, 맥주"라는 글씨도 보인다. 굴림체는 작게 써도 간판에는 촌스럽다.

지나쳐 가려는데, 오늘 같이 재수 없는 날엔, 더욱이 갈 곳이 없어 집 근처로 차를 몰고 온 날에 잘 어울리겠다 싶어, 누가 볼까 두려운 맘으로 조심스레 문을 열어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테이블은 2개 밖에 없지만, 제법 두꺼운 나무로 된 bar가 눈에 들어온다. 어서 오십시오 라는 인사말을 듣고 나서 소리 나는 곳을 쳐다보니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가 bar 안에서 인사하고 있다. 배 나온 아줌마가 빤짝이 원피스를 입고 동네의 원로들에게 나폴레옹 따위의 양주나 접시에 담은 요구르트 병을 서빙하는 동네 술집을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이거 영 딴판이어서 기대와는 다르다.

자리 하시죠. 식사는 하셨나요?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전작(前酌)이 있으신지요? 등등의 물음에 대충 대답을 하는 도중, 귀에 들리는 비지엠은 말러의 교향곡 "리서렉션"이다. 오호... 이런 취향의 바텐더가 저런 간판을 달고 장사를 하고 있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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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하지만 식사가 될 까요?
빌어먹을 10년 넘게 일한 회사에서 배운 것은 뭔가를 물어볼 때 "죄송하지만"을 붙이는 것이다. 뭐가 그리도 죄송한 게 많은지.

-제가 죄송하게도 식사는 되지 않습니다. 간판에서 보시다시피 주류만 드실 수 있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사장은 별로 죄송해 보이지 않는다.
듣고 나니 기분이 약간 나빠진다. 술집에서 밥 되는 안주 따위 줄 수도 있자나...

-보시는 바와 같이 저희는 주방이 따로 없습니다. 간단한 스낵 정도라면 가능하지만요.

똑 부러지게 말하는 모양새가 좀 얄밉다. 직구를 한 번 던질까?.

-간판이... 진짜 촌스럽네요.

-손님들이... 다들 그러시네요. 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

신경 쓰지 않는다.

....

-맥주 주세요. 500으로...

-죄송합니다만, 저희는 생맥주가 없습니다. 생맥주를 서비스하려면 회전이 좋아서 남는 재고가 없어야 계속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는데, 찾는 손님이 많지 않다 보니 버리는 맥주가 많아져서 서비스를 포기했죠.

이번엔 표정에서 약간의 '죄송함'이 배어 나온다.

-그럼 아무거나 주세요.

-알겠습니다. 맥주는 병맥주로, 식사를 안 하셨다고 하니, 스낵을 좀 넉넉하게 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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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속에 맥주와 땅콩을 털어 넣고 있자니, 왠지 청승 맞기도 하고 속도 허하고 영 기분이 별로 다. 기분이 좋아 지려고 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더 나빠질 필요는 없는데

-손님, 표정을 보니 안 좋으신 일이 있으신 것 같네요.

이런 후진 집에 내 사정을 털어 놓는 것도 아깝다.

-, 뭐 딱히 좋은 일은 없습니다만

-집에서 싸온 초밥이 있는데 그거라도 같이 드시겠습니까? 원래 바에서는 식사를 드리지는 않지만 말이죠...

이 양반이... 그런 게 있으면 진작 줄 것이지

-염치는 없지만, 사양 않겠습니다.

바텐더는 잠깐 허리를 숙이더니, “김초밥입니다.” 라며 약간 시큼한 냄새가 나는 초밥을 내어 왔다. 자세히 보니, 말이 좋아 김초밥이지, 그냥 초에 절인 밥을 김으로 둘둘 말았다.

-입맛에 맞으시나요?

-… ‘지금은 배가 고파서 뭘 먹어도 맛 있을 거 같지만…’라는 말이 목구멍을 통과하려는데,

-절임으로는 유자초를 썼습니다. 쌀로 만든 식초도 맛나긴 하지만, 음식 맛을 낼 때에는 유자초가 좋거든요.

-

딱히 별로 다르게 맛나는 게 없는 거 같아 건성으로 대꾸하고 말았다.

-사실 이 초밥은 비장의 무기는 있죠.

라며 얼굴 가득 웃음을 띄우면서 바텐더가 내 주는 것은 명란젓 같은 것이었다. 마치 너 지금 맛 없는 거 다 안다. 근데 이걸 먹으면 생각이 바뀔 걸?” 라고 말하는 것 같은 웃음.

명란 젓갈의 칼라가 좀 선명하지 않아서 명란젓 아닌가요?”라고 되물으니,

-, 그런데 저염 명란젓이죠. 색이 조금 흐리죠. 초절임 김초밥만 먹어도 괜찮고, 명란젓만 따로 먹어도 괜찮지만요 같이 먹으면 훨씬 더 맛있습니다. 한 번 드셔보시죠.

빈 속에 맥주만 부어 넣은 배가 허해서, 저런 말 따위야 맞든 말든 상관이 없었지만,
초밥 위에 명란 젓을 살짝 올리고 참기름만 조금 찍어서 먹었더니,

- 이거 정말 맛있는데요??

-, 먹을 만 합니다. 저염 명란젓이라 많이 짜지 않아서 명란의 맛을 잘 느낄 수 있는 대신 약간 비린데요, 초절임의 신맛이 비린 맛을 살짝 가려줍니다. 둘이 어울리는 맛이 괜찮죠.

-그러게요. 근데 저 때문에 준비하신 식사를 절반만 하시는 게 아닌가 싶어서 죄송한데요?

-걱정 마세요.  2천원 입니다.

뭐야. 돈 받는 거야? 아까는 밥 되는 안주도 안 판다며?

-농담입니다. 식사는 팔지 않습니다. 대신 칵테일을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그 칵테일은 차지를 해야 합니다. 괜찮으시겠어요?

-그러시죠.

-평소엔 어떤 종류의 칵테일을 주로 드셨습니까?

-갑자기 물으시니 생각이 잘 나지 않는데 마티니나 진토닉 정도를 먹었던 것 같아요. 외국에 출장을 가면 들리는 호텔 바에서는 맨하탄 정도

-조금 알코올이 강한 스타일을 좋아하실까요?

-잘 모르겠지만, 오늘은 지독히도 운이 없는 날이니 독한 걸로 부탁 드립니다.

-알겠습니다. , 운이 없는 날인지는 이 한 잔을 드신 후에 생각하셔도 됩니다. 아직 오늘이 끝난 것도 아니니까요

바텐더는 잠깐 백바(back bar)로 가더니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평소에 위스키는 자주 드시나요?

-그닥 즐기는 편이 아닙니다. 술은 소주죠.

-맞습니다. 소주는 정말 좋은 술이죠. 하지만 오늘은 좀 다른 것을 드셔보셔야 하니

뒤돌아서 술병을 몇 개 bar 위에 올려 놓는다. 모두 처음 보는 술병이고, 이름도 잘 읽혀지지 않는다.

-처음 보시는 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절대 독은 아니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마누라들에게는 남편들이 먹는 어떤 술이든 독이죠. 여기 이 술은 드람뷔라는 리큐르 입니다. 몰트 위스키와 꿀, 허브 등을 조합해서 만든 술입니다. 한 번 시음을 해 보시죠.

혀 끝에 살짝 닿기만 했는데도 맛이 강하다.

-꿀이 들어가서 그런지 달기는 한데 강하네요.

-정확한 표현이세요. 강하고 답니다. 술을 섞는다고는 하지만, 도수는 40%를 유지하니 많이 드시면 곤란하실 수도 있어요. 개성이 강한 리큐르라 이 술만 드시는 손님들도 많이 계십니다.

바텐더는 bar 위에 올려놓은 다른 술을 들고서는

-싱글몰트 위스키를 즐기시나요?

-위스키는 즐기지 않지만 알긴 알죠. 시바스 리갈 같은 거죠? 싱글몰트는 잘 모르겠는데요?.

-잘 됐습니다. 이 술은 라가블린 이라는 위스키 입니다. 향이 진한 위스키로 유명한 아일라 섬 위스키 중에서도 독특한 피트 향과 흠이 없는 맛으로 인기가 있는 친구입니다.

-피트향?은 또 뭔가요?

-피트를 설명 드리자면, 위스키를 어떻게 만드는 지부터 설명을 드려야 하는데, 그러면 말이 길어지게 됩니다. 바텐더가 말을 많이 하면 그만큼 술 맛이 떨어지는 법이니, 나중에 천천히 알려 드리죠. 일단 한 번 맛을 보시죠.

샷 글라스에 따라 준 술은 진한 호박색인데, 전등에 비춰보니 칼라가 아주 예쁘다. 평소에도 독한 술을 잘 먹지는 못해서 독약 먹듯 천천히 잔을 입에 가져갔는데,

-어흑, 뭡니까? 이 향은소독약 냄새 같기도 하고요.. 코를 찌르네요. 이런 냄새가 나는 위스키가 있었나요?

-그 냄새가 피트향입니다. 강하죠? 소독약 냄새랑 비슷해서 처음 드시는 손님 중에는 병원에서 먹는 술이냐고 물어 보시는 분도 있으시고요. , 이제 보시죠.

바텐더는 록 글라스의 1/4 정도 라가블린을 먼저 따른 후, 목이 긴 티스푼으로 꿀을 조금 뜨더니 그 위에 드람뷔를 살짝 언지고, 토치로 불을 붙였다. 파란 불꽃이 올라오는 티스푼을 라가블린이 담긴 글라스 위로 옮기더니 드람뷔를 티스푼 위로 천천히 흘렸다. 불꽃은 꺼질 듯하면서도, 조신하게 자신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글라스 위로 떨어져 내려갔다. 바텐더는 꿀을 모두 떨어뜨린 후 글라스를 스푼으로 여러 번 젓고, 라임을 짜서 마무리하면서,

-에버딘 앵거스 입니다. 드셔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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