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 히로아키 - 무한의 주인 (2)



처음 무한의 주인에 대한 글을 쓸 때에는 완결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는 게 스포일러가 되는 때였지만, 이제는 완결편의 한국어판이 나온지 석 달이 넘어가고, 그 완결에 대한 review도 이제는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남들이 한 얘기를 피해서 쓰는 글쓰기가 조금 더 어려워지긴 했지만, 원래 하려던 얘기는 아직 할 수 있을 것 같아, 늦었지만 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절대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라도 제목 옆에 있던 (1)이라는 숫자 때문에 (2)편을 기다리셨던 분이 계셨다면,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단일 게시물이 1,500 view가 넘어갈 줄은 저도 몰랐거든요. -_-;;)


3. Irreversible






(모니카 벨루치 누님의 당당한 뒷자태... 라고 하고 싶으나, 저 장면 뒤에 벌어지는 일은 기울어진 프레임이 암시하듯 매우 참혹하다.)


- 열역학의 제 2법칙인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깨지지 않는 우주에서는, "시간"이 방향성을 잃지 않고 한 쪽 방향으로만 이동하는 운동값을 갖게 됩니다. 상대성 이론에 따라, 빛의 속도가 중력권을 탈출할 수 있는 속도보다 느린 블랙홀 근처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0에 수렴할 수 있겠지만, 0의 뒤쪽으로 가지는, 즉 엔트로피가 감소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시공간 안에 제약을 받는 우리 모두는 "Irreversible" life를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죠.

이런 실제의 삶이 불만스러웠는지, 감독은 이 영화의 plot을 시간의 역순(reverse)으로 배치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배열이 시간이 어떻게 모든 것을 파괴하는 지 잘 보여주게 되는데요...



(이 영화를 관통하는 Motif.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괘.한.다. )


모니카 벨루치 (영화의 모티프와는 반대로, 시간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걸 당분간 포기한 듯 보입니다. 매트릭스 리로디드에서 페르세포네 역을 하실 때 이미 우리 나이 39세였죠.) 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에 가장 참혹한 일을 당하게 되고, 이에 격분한 빈센트 카셀 (오션스 트웰브에서 Night Fox로 나오셔서 조지 클루니에게 관광당하는 그 분 입니다.)과 친구는 복수를 감행합니다. 검붉은 조명만 사용하는 초반 빈센트와 친구의 복수 scene 과 붉은 조명 아래서 벌어지는 중반의 린치 장면을 지나면, 옐로 톤이 지배하는 행복한 시절들이 스크린 위를 잠깐 흐르다가 마지막엔 녹색의 잔디와 그 위에 편안하게 누워있는 허연 벨루치 누나를 통한 선명한 대조가 "빵" 하고 튀어 나옵니다. 관객은 마지막의 장면부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구요.



- 영화 중반부의 린치 장면은, 계속적인 시청을 위해서 일정 정도의 노력(!)이 필요할 정도 (물론 개인차는 있겠습니다만)로 잔인합니다. 실제적인 폭력이 행사되는 장면도 장면이지만, 피해자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순전히 "재수가 없어서" 당하게 되는 것도 만만치 않게 몸서리 쳐지는 설정입니다.

지면으로 옮겨져서 그렇지, 영화보다 100배는 잔인한 장면이 등장하는 이 만화에서, 해당 장면에서 참 많은 경우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을 소개합니다. 이름이 "시라"입니다.



(Animation version이어서 좀 더 멀쩡한 모습으로 그려진 시라.
 너의 시작은 멀쩡하였으나...)



(그 끝은 악귀이니라. -_-;;;)


이 만화는 주인공 "린+만지"의 대척점에 "일도류"를 두고, "일도류"의 상대로는 "무해류" 와 그에 이어지는 "록키단"을 두어서, 스토리를 진행해 나갑니다. 각각의 집단 입장에서 보면 대척점에 서 있는 다른 집단이 "악"이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겠으나, 독자에게는 각각의 집단에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장치가 중간중간 마련되어 있어서, 시점의 이동에 따라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 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대립 관계를 벗어나 "절대 악"으로 그려지는 인물이 있는데, 그 놈이 바로 시라 입니다.


시라는 만화의 초반부에서 무해류의 멤버이자, 개고기를 좋아하는 그저 그런 새끼로 상큼하게 등장합니다. 관리를 포함하여 100인을 죽인 것으로 알려진 만지를 무해류에 끌어들이기 위해 린과 만지에게 접근하는 거죠. 첫 만남 후 얼마간 린은 그냥 키나 멀쑥하게 큰 노멀 NPC (이게 뭔지 모르시면 검색해 보세요.) 자객처럼 보이는 시라에게 약간의 신뢰를 보여 주게 되지만, 상대방에게 더욱 큰 고통을 주기 위해 일본도가 아닌 장미칼 (칼에 장미가 그려졌다는 것은 아니구, 칼날이 톱날로 되어 있다는 뜻인데, 유머를 해설하다니 셀프로 망했군요.) 을 들고 다니면서 사람을 산 채로 썰어 버리는 모습을 보게되자 기겁하게되고, 불필요하고 무차별한 살육을 보다 못해 만류합니다. 시라는 자신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린 마져 썰어 버리려고 하지만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만지에게 오른손만 잘린 채 (일단) 도망칩니다.
이 때까진 비리비리하게 그려지던 시라는, 이 후 여러가지 고난(?)을 겪으며 그냥 일반적이고 평범한 성도착적 사이코패스에서 진짜 미친 개새끼이자 악의 화신이 되고맙니다. 만화의 후반부이자 종국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뇌와 만지에 필적하는 불사의 몸까지 얻게 되어, 린의 생사를 걸고 만지와 최후의 일전을 벌이게 되죠.



- 앞서 소개한 영화 중 나오는 몸서리쳐지는 린치 장면은, 이 만화에서 그려지는 시라가 연출해 내는 장면들과 비슷합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Le Tenia (등장인물의 이름이 우리말로 촌충입니다. 아주 그럴 듯한 이름이죠.)는 모니카 누님을 먼저 강간한 후에 죽어라 패는 반면에, 시라 ( 이름은 애매한데... しら라고만 쓰면 하얗다는 되어 시라의 흰머리와 어울어지는 반면에, 작가가 정한 한자 이름은 尸良 여서, 억지로 갖다 붙이자면 시체가 좋다라는 뜻이 되어 캐릭터의 성격을 묘사해 버린다... 저는 생각하고 있지만, 일본어 짧아서 맞는 말인지는 몰라요. -_-;; ) 는 일단 썰어 놓고 강간한다는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잔인함과 비인간적인 면에 있어서는 도진개진입니다. 행위의 과격함은 만화의 강도가 우월하고, 전달력은 영화 쪽이 좀 더 생생한 것 같구요. (곁다리로,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브래드 할리의 마차"는 시라와 희생자만 잔뜩 쌓아둔 듯한 작품입니다. 고어물 좋아하시는 분들은... 우웩... 좋아 하실... 우웩.)


영화에서는 시간에 흐름에 따라 망쳐지는 인생을 녹색 - 노란색 - 붉은색 - 검은색 조명 톤으로 암시해 주지만, 만화에서는 시라의 외양 묘사를 통해 어떻게 시간이 한 인간을 훼손하는 지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첫 등장엔 키크고 멀쑥했던 무사는, 팔이 잘리자 반쯤 남은 하박의 뼈를 (땅에 떨어진 뼈 말고 지 몸에 아직 붙어 있는 걸) 깍고 갈아 무기를 만들고, 뼈를 깍을 때의 엄청난 고통으로 머리가 하얘지고, 남은 한쪽 팔 마져 또 잘리고,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뇌를 다쳐서 고통을 느낄 수 없게 되었을 때, 시간은 한 인간(어짜피 사이코 패스긴 했지만.)을 완전히 파괴하여 지워내고, 대신 괴물 한 마리만 땅 위에 세워 두게 되죠.



(어깨 밑 부분이 허전하긴 하지만, 드디어 완전체로 진화한 시라의 풀샷.
나랏일 하는 사람이 거짓말하면 좋되는 거임.)




- 처음엔 그저 그런 만화일 줄 알았는데, 극의 흐름에 맞춰 성장하는 악마 캐릭터가 나오네요. 더 재미있는게 또 뭐가 있을 지 궁금해 지는데요...







4. Man from earth? / Wolverine? / Usual Suspects?






(등장하는 개성있는 인물들과 재미진 영화들을 매칭하는 것은 여기까지만 해 보겠습니다. 달랑 세 명에 대해 쓴 주제에 여기까지만 하겠다고 하는 이유는... 어떻게든 이 posting을 빨리 끝내고 싶어서 입니다. -_-; 포스팅을 시작해야 겠다고 마음 먹게했던 아노츠 카게히사와 하바키 카게무라의 빗나간 애증관계, 블랙 사바스의 이름을 고대로 딴 (것으로 심하게 추정되는) 진상변태 쿠로이 사바(th)토, 2차 대전 당시의 731부대를 연상케 하는 에도의 지하 감옥과 일본 제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 등장하는 서양의학 부란도 선생 등에 대해서도 줄줄이 풀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으나 작금의 세태는 저를 뭔가를 쓸만한 시간을 주지를 않고 있어서요. 나중에 조금은 집중할 시간이 된다면 다시 한 번 도전해 보겠습니다.)




이 만화 전체의 이미지와 비슷한 영화를 찾아보자면, 속살이 솔솔~ 마데카솔 같은 재생력의 울버린이나, 영원의 시간 안에서 살면서 역사 속의 굵직한 경험들은 죄다 해 내신 분을 그린 맨 프롬 어쓰와 조금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_-





만화의 도입은 진부한 칼부림 만화로 시작합니다. 강한 악역들을 세워 놓고, 힘없는 주인공이 기연을 통해 만난 극강 캐릭과 함께 악의 무리들을 쓸어버리는 초반부의 스토리는 다른 만화에서 너무 많이 봐와서 식상하죠. (사무라이 쿄우나 바람의 검심이 대표적이겠네요.) 다른 만화들과는 다르게 검법 초필살기가 나오지는 않지만, 죽지 않는 몸 자체가 필살기와 다름 없으니 피차가 일반일 뿐이구요.

작가의 필치도 처음 만화가 단행본으로 발간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개성 넘치긴 하지만 선이 굵어서 조금은 투박해 보이고, 전투신 역시 딱히 특별해 보일 게 없었습니다.



(단행본 1권과 28권에서의 만지. 
1권 발매 후 28권이 나오는데 십수년이 걸렸는데, 그 동안 이뤄진 벌크업 확인을 위한 비교샷.
턱선 함 봐라, 왼쪽에 비하면 부처님이다.) 




단행본 4권까지는 악역들을 찾아 다니면서 죽이는 소소한 에피소드들로 진행이 됩니다만, 시라가 등장하는 5권부터 작가님이 갑자기 만화가에서 스토리 텔러로 각성을 하시게 되는데...

주인공의 어머니를 강간하고 죽이는 나쁜 놈들로 가득한 소굴로 그려져야 마땅한 일도류가 자신의 검에 인생을 건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임으로 변해갑니다. 일도류가 나쁜 놈들이기 때문에 그 놈들을 잡으러 다니는 무해류가 착한 놈이어야 하는데, 그 중엔 시라 같은 새끼가 껴 있습니다. 일도류의 수령이자 린 아버지의 원수인 아노츠 카게이사는 그냥 천상 나쁜 놈여야 하는데, 알고 보니 검술의 강함을 추구하는 무사로서의 강한 자긍심을 지닌 놈이며, 심지어 불우한 환경에 빠진 마키에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줍니다. 무해류와 그에 이어지는 로키단의 수령이자 두목으로, 관=막부를 상징하는 하바키 카기무라는, 나라에 헌신(?)하는 굳은 의지와 목적을 위해 어떠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재주(??)를 같이 갖고 있어서 수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인도합니다만, 가정으로 돌아오면 아내와 아들과 배다른 다른 딸에게 자애로운 훌륭한 가부장적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렇듯 주인공과 그 주변의 사람들의 인격이 흔히 그려지는 전형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그려지면서 스토리의 재미가 배가 되기 시작합니다. 가장 큰 변화는 당연히 주인공인 만지에게 일어나는데, 100명을 죽인 살인귀에서 상당한 양식을 지니고, 단서를 갖고 추리를 해 나가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냉정하고도 유머를 잃지 않는 하드보일드 소설 속의 탐정으로 변해 가거든요. (유려한 턱선은 보너스!죠)


정리하자면, 1993년에 태어난 만지와 그 외 만화 속 초반부의 다른 캐릭터는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면서 전형성을 잃어버리고 좀 더 복합적이고, 개성적인 인물들로 변해 갑니다. 만화의 후반부에서는 전형적인 캐릭터들과 그렇지 않은 인물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나오구요. 단순했던 스토리 라인은 점점 복잡해지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마지막 대단원에서는 만화 내내 그려져 나오는 칼로 인한 삶과 죽음에 대한 의미가 논어의 (이런 무리수를...) 문구와 함께 그려지기도 합니다.



이 정도면... 고바야시가 카이져 소제가 되는 반전입니다. 어떤 게 반전되냐구요? 네... 작가님이죠.



(4권까지의 절름발이가 작가입니다.)





물론, 연재 시작 직후부터 업계의 찬사를 받았던 작가의 필치나 화면 구성/ 장면 연출력에 대해 폄하하는 건 아닙니다. 단지, 그림체 좋은 B급 무협 만화가 S급으로 분류될 수 있을 정도의 quality가 있는 만화로 탈바꿈하는 것에 대한 놀라움과 존경스러움의 표시죠. (실제로 저는 story 작가가 중간에 합류한 것으로 생각했었으나, 알아본 결과 그런 협업은 없었던 같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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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마무리를 했지만, 어쨌든 포스팅은 끝났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추석, 평소에도 많이 남았으나 연휴가 되면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너님들은 1~30권 옆에 끼고, 라면과 쥐포 작살 내면서 도전해 보심이 어떨까 합니다. 아, 생각만 해도 행복하군요.










P.S 아노츠와 하바키의 사랑(-_-)과 link할 다른 소설은 시드니 셀던의 "내일이 오면 (If tomorrow comes)" 였습니다. 번외편을 쓴다면 그걸로 쓸겁니다. 아마.


P.S. 시라와 링크할 영화로는 "Irreversible"과 "악마를 보았다" 사이에서 심하게 고민하였고, 간신히 전자를 고른건데, 망했군요. 하지만 후자와의 연계도 잘 하진 못했을 겁니다. 전 저를 잘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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