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 김현 (문학과 지성사, 1993)


며칠 전부터 재밌게 읽고 있는 책이 있어서, 그대로 옮겨본다. 작고하신 분의 허락을 구할 방법을 몰라 일단 그대로 베껴쓰고 출전을 밝힌다.



1986.9.21

천일야화에 나오는 숱한 노래들은 아라비아의 시적 수준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별이나 사랑의 시들은 특히 뛰어 나다.

그대 떠난 후 단잠을 맛보았다면,
원컨대 신이시여, 은총을 끊으시라.
그렇다, 이별한 후 한번도
나의 눈은 감겨지지 않고,
이별한 후 편안히 쉰 적도 없었네!
그대는 나의 꿈 보았는지
아, 원컨대, 밤의 꿈아 생시에 나타나거라.
그리운 것은 밤의 휴식
잠든다면, 그리운
그대 모습 꿈에 보건만

잠이 들면 꿈속에서나마 그대의 모습을 볼 터인데, 잠도 오지 않는다는 비통한 탄식은 뛰어난 호소력을 갖고 있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라는 황진이의 시나, 한용운의 이별 노래와 맞설 만하다.



9.30

미국 영화가 자꾸만 애국심을 강조하는 것은, 미국의 지접 힘이 자신감을 일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자기 나라가 좋은 나라라는 것을 선전해야만 안심이 되는 나라는 이미 그렇게 좋은 나라가 아니다. 자기 나라가 좋지 않은 나라라고 비판하는 것을 그대로 놔두고 그것을 수용하는 나라가 차라리 좋은 나라이다. 그 체제를 나는 '부정적 신학'이라는 용어를 차용하여 '부정적 체제'라고 부르고 싶다.



12.28

<전략>

'미래시' 동인지 10집 <존재와 언어> (융성출판사, 1986)에는 좋은 시들이 많지 않다. 동인들의 시의 수준은 그저 그렇고, 거기에 초대된 김영태의 <눈화장>은 아름답다. 그의 시적 자질이 자유분방한 대상 묘사에 있음을 이제 확연히 알겠다.

아이 섀도를 칠한
달이 뜬
추석 대보름
눈두덩이 푸르스럼한
아니, 요즘 십대들은
엷은 자색을 눈가에 바르지
아이라인으로 근 다음 뭉개
번지도록
눈화장을 하고
하늘에서 세상 구정물을 내려다보지

추석 대보름달과 십대의 눈화장을 결부시킨 솜씨는 범연하지 않다. 그런 눈화장을 한 달이 "하늘에서 세상 구정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달은 비록 요즘 십대처럼 눈화장을 한 달이지만 내려다보고 있다. 그 내려다보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김영태의 초속주의는, 그의 시선이 달에 가 있을 때에도, "세상 구정물을" 내려다보지 않고는 못 견딘다. 그의 초속주의는 변태성욕자의 초속주의라고나 명명해야 할 초속주의이다. 겉으로 자색이 번져나오는 푸르스럼한 추석달, 생기 발랄한 십대의 달. 그 달이 바라다보는 것은 맑은 하늘이 아니라 세상 구정물이다. - 세상에는 맑은 물이 없다는 듯이.


1987.1.31

구멍의 공에 제일 깊게 사유한 최초의 인물은 노자이다. 그는 항아리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항아리의 텅 빈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빈 곳이 있어야 채울 마음이 생겨난다. 공은 행위, 욕망의 행위의 밑바닥이다. 장자는 그것을 더욱 논리화해서, 구멍을 뚫으면 혼돈은 죽는다라고 말한다. 그것을 뒤집으면, 구멍이 있으면 혼돈은 없다. 그 구멍은 질서, 사회 생활의 기본틀이다. 구멍이 없는 존재는 완전자 -  신/악마/자연.... - 뿐이다. 구멍이 있는 것은 모두 인간적이다. 인간은 구멍의 모음이다. 채워도 채워도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구멍들...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 (정음사, 1968)의 가장 끔찍한 전언은 맨 앞 댐복에 숨겨져 있다. "... 그러나 인간의 사는 힘은 강하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동물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 익숙해 질 수 있는 동물이라... 그 동물은 체념에도 쉽게 익숙해진다. 불편하고, 더러운 것, 비인간적인 것에 익숙해진 인간의 모습은 더러운 것인가, 안 더러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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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조선 반도에서 태어난 선배의 일기(특별한 글도 아닌 그냥 일기)이다. 물론 저자의 글을 수능시험의 지문으로 밖에 겪어보지 못한 내가 글쓴이를 선배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건방진 일이다. 그를 선배라 부르는 이유는 그와 내가 한 때 같은 시간대에서 숨이라도 한 번 같이 쉴 수 있었던 시대 공유인이어서, 그를 "조상"이라 부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상이라고도 부르지 못하는 선배와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즐기는 텍스트가, 사유하는 뉴런의 깜빡임이 이렇게 수준차가 나도 되는 것인가.

우리는, 우리의 선배들과 이미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선배들과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지도 모른다. 조선시대의 조상님에 대한 말이 아니다. 바로 우리의 선배들에 대한 말이다.



한스럽고, 바보같아 깊은 절망감에 빠지는 2013년의 마지막날이다.




P.S 노자의 구멍론을 보자면, 이미 그는 닫힌 계와 열린 계, 그리고 엔트로피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있었지 않나 싶다. 인간을 구멍의 모음으로 정의한 것은 그가 DNA - RNA - 단백질 구조를 이해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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