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거미의 이치 - 京極夏彦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오랜만에 글을 쓰는 것에 대한 감상을 아래와 같이 밝힌다.


"2014년 난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그 동안 많은 것을 잃었다."




무당거미의 이치 - 京極夏彦 (교고쿠 나쓰히코 혹은 나츠히꼬. 뭐든 상관 없다.)




원래 "알아도 별 도움은 안 되지만, 가끔은 재밌는 것들이 있지"의 시리즈로 경극하언 선생에 대한 얘기를 풀어볼 예정이었으나, 이런 놀라운 작품은 따로 떼어 포스팅을 해야 마땅하다. (교고쿠 나츠히꼬에 대한 긴 얘기를 쓰기 귀찮아서 그러는 건 아니...)



작가 본인이야 백귀야행 시리즈라고 줄기차게 주장하나, 다들(심지어 출판사 조차도) 교고쿠도 시리즈로 알고 있는 일련의 작품 중 5번째, "무당 거미의 이치"는 그간 (혹은 최소한) 한국에 정발되어 세간에 알려진 작품 중에 최고로 뽑을만 하다. 최소한 나에게만은 그렇다. 2004년 교고쿠도 시리즈의 첫 작품을 접했을 때 느꼈던 긴박함/새로움(두 느낌을 줄이면 신박함인가?)/아찔함/이 새 작품이 나올 때마다 사인커브(우부메의 여름이 빅히트였으니 코사인 커브인가?)를 그리면서 변하다가, 이 책에 이르러서 커브의 최고점에 다다른 느낌이다.



책을 열자마자 추젠지로 의심되는 검은 옷의 남자와 "거미"로 지칭되는 여자의 대화가 나오는 걸 보고, "아, 이 양반 추리력의 약발이 떨어지니 이젠 시간 구성을 꼬았나?"란 의문이 들었으나... 마지막까지 다 읽은 후엔 "죄송합니다, 센세. 제가 감히 당신을 의심했습니다."란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실제로 조용한 방에서 무릎을 꿇고 조아릴 뻔 했다.)
추리력이 떨어지기는 개뿔, 이전의 작품들에서도 빛났던 미스테리를 이어가는 힘은 계속 찬란하게 빛을 발했고, 망량의 상자 이후로 자주 사용하던 두 가지 사건의 병행 및 교차 구성, 사건이 사건 밖으로 튀어나오는 액자 구성은 더욱 정교해 졌으며, 거기에 새로 가미된 수미역행쌍관 뒷통수 치기의 화려한 기술이 등장하다보니 책을 다 읽은 후의 나는 그냥 녹다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중간, 중간, 이전의 소설과는 다르게 결말을 "쉽게" 암시할 수 있는 대사들이 튀어나와 이번엔 지나치게 친절한 거 아닌가 싶었으나, 이 역시 나뭇가지인 줄 알고 잡은 것이 자벌레였고, 대머리 뒷통수인 줄 알고 때린 것이 앞이마 격의 속임수였으니...

기바 형사가 나올 때에는 하드보일드, 에노키즈가 등장 할 때에는 환타지 활극, 추젠지가 화자가 될 때에는 추리물이 되는 장르 점프의 솜씨가 더욱 더 화려해졌으며, 소설의 마지막에 이번 시리즈에 등장하지 않았던, 항상 무시되고 비천하게 취급받는 세키구치를 등장시키면서 "탐정이 범인에게 졌다!"라는 암시를 같이 줄 때에는 정말이지 감탄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각각의 독특한 캐릭터를 잘 살려서 하나의 글을 재밌게 완성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아예 한 권에서 여러 장르가 뒤섞고, 마지막을 하나로 휘몰아 나가는 걸로는 이 센세를 넘어서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니, 아예 이런 시도를 하는 사람도 보지 못한 것 같다.

일본의 전통 요괴를 소개하고 글에 끌어다 붙이는 덕력이야 그야말로 명불허전, 이 사람이 모르는 게 뭘까라는 궁금증이 끊이질 않는다. 심지어 이 책은 1996년에 쓰여졌으나, 2015년의 사람이 읽어도 현 시대의 글인 느낌을 준다. (물론 이는 정발 번역을 맡으신 김소연님 탁월한 번역의 힘도 한 몫을 했다. 진심 감사 드린다.)


살짝~ 아쉬움 점은, 마지막에 반전을 몰아 주다 보니, 캐릭터 중 일부에게 무리한 설정을 시도한 면이 있고, 여주는 항상 하얀 피부에 숨이 막히는 미모를 자랑하는 전형적인(?) 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있으나, 이 소설의 감동을 0.1% 정도 깍아 먹는데 그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더 이상 썰을 풀었다간, 스포일러가 될 소지가 있으니 이번 posting은 여기까지만 하자. 교고쿠 나츠히코와 교고쿠도 시리즈에 대한 얘기는 앞서 말한 "알.별.도.가.재"의 시리즈로 이어보자. 이렇게 재밌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재미없는 인생을 살았을 리 없다.




P.S 시리즈 중 이 소설의 다음 편인 도불의 연회나 좀 빨리 한국 정발 되길 바란다. 작가가 글을 쓴 게 98년이다...2008년이 아니고... 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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