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방위
마눌에게 전화가 왔다. 낼 오빠 민방위란다...
집에 와서 통지서를 보니, 비상 소집 어쩌구를 아침 칠시에 한다고 써 있다.
일 평생을 남들이 시키는 것을 하고 살아온 나는 6시 반에 일어나서 세수도 안 한 채로 동사무소를 찾아갔다.
아침엔 조낸 추운거구나… 느끼면서, 그 시간에 양복 깔끔하게 입고 출근하는 사람들 보면서 신기해 했다.
동사무소 근처까지 가니, 딱 봐도 민방위 가는 형아들이 하나 둘 눈에 띈다. 뒷모습만 딱 봐도 거친 인생을 겪었을 형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뒤 돌아서서 너 담배 있냐? 라고 물으면 돗댄데요… 라고 답해야 하는 지 잠깐 고민도 하고 그랬다.
동사무소의 대강당이라고 쓰여 있는 곳에 갔더니, 이상한 아줌마와 아저씨들이 통지서에 전번만 까고 수집함에 넣고 가란다. ㅡ ㅡ ;
일어나서 물 한 잔 안 먹고 왔는데…
집에 와서 곰곰히 생각했다. 간만에 할 일도 없는데, 정말 이 순간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결론은 잠.
자고 일어나니 4시다.
4시까지 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생각에 조낸 불행해 졌다.
뭘 해 먹을까 하고 냉장고를 보니, 내방 반 만한 냉장고에 있는 것은 2주 전 피자 시킬 때 따라온 1.2리터 펩시콜라 병에 0.2리터만 덩그러니…
그 외엔 찌어놓은 마늘과 먹다 남은 쌈장뿐…
전자레인지에 뭐 돌려 먹을 것이 없나 하고 냉동고를 열어보니, 상황이 냉장실과 달리 버라이어티 하다.
울 마눌이 입덧할 때 먹던 누룽지, (울 아들은 올해 돌 지났다.) 지난 “설”에 회사 동료가 고향 다녀 오면서 갖다준 쥐포, 유통기한 2009년인 냉동돈까스가
내 손에 들려 올라 올 때마다 조낸 부끄러운지 헤벌쭉 웃는 것 같다. 나도 덩달아 얼굴을 붉혔다.
마지막에 나온 놈이 강적이었는데, 이놈은 구워져서 접시에 가지런히 놓인 채 랩에 곱게 싸여 있어서, 함 먹어볼까 하고 꺼내보니 그릇이 예전 살던 동네의 중국집 그릇이다. (난 2008년부터 지금 사는 동네에 살고 있다.) 랩을 까 보니, 온갖 곰팡이의 향연이… 생각해보니, 우리 집 냉장고는 최소한 2차례에 걸쳐 수리를 했으며, 수리하는 동안은 냉동이 해동 되었을 터였다.
말하자면 이놈은 빙하기와 간빙기를 2번씩 걸쳐 살아남은 화석과 같은 놈이었… 누렇고 푸르딩딩한 그 놈들은 가위로 예쁘게 잘라서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고, 그릇은 뜨거운 물로 닦았다.
암튼 먹을 것을 찾다보니, 올레, 라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꿈의 구장을 지을 수 있는 진라면과 다른 하나는 해물탕면.
일단 진라면을 곱게 끓여서 쭉 빨아올려 먹으니, 김치가 없어도 맛난다. 먹으면서 이 놈을 몇 개를 먹어야 꿈의 구장을 지을 지 생각해 봤는데,
야구장 짓는 데 대충 천억 정도 든다면, 라면 하나를 1000원에 팔아도 1억개 팔아야 매출액이 천억이다. 근데, 매출액도 아니고, 수익금의 일부를 기부하는 것이니… 몇 개나 쳐먹어야 창열이가 좋아할 지 감이 안 온다.
라면을 하나 먹었는데, 스틸 배가 고프다.
해물탕면을 곧바로 이어서 끓여서 훌훌 다 먹었더니, 첨엔 노곤하니 괜찮더만…
체했다. 제길슨.
머리가 지끈지끈 깨질 것 같고, 속이 울렁거리는데, 속편한 소화제 속청을 사다 먹었는데도 내려가질 않는다. 위장에 레버가 있으면 변기물 내리 듯 내려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머리 아프고, 속 니글니글한 것과 싸우다보니, 어느 덧 새벽 1시다.
스타2라도 한 판 했으면, 하루가 덧 없지 않았으련만.. 그렇게 지나가니 허무했다. 나라를 지킨 것도 아닌데…
담날 회사에 와서, 같이 일하는 후배와 담배를 피면서 어제의 전과에 대해 간략히 보고하니, 그 자식 하는 말이, 라면의 굵기가 서로 달라서 위에 들어가서 꼬여서 안 내려 간거라나?
된장맞을. 빨리 알려주지… 알았으면 씹어 먹는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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