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선물 - 오! 헨리. (상)
나는 프로게이머... 였다. 아니, 현재 내가 밥을 먹고 사는 직업으로만 얘기하자면 프로게이머, 맞다. 매일 아침(?) 11시에 기상! 눈을 비비고 컴 앞에 앉아서 삼각 김밥과 컵 라면을 앞에 두고 새벽 3시까지 RPG 게임만 하고 있고, 게임에서 얻은 아이템을 현피로 팔아서 삼각 김밥과 컵 라면을 다시 사서 먹으니, 직업적인 게이머가 맞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나, 윤리 시간에 "직업은 단지 생계 수단이 아닌 자아실현의 수단임."이라고 교실 칠판에서 봤던 거 같긴 한데, 그 때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던 말이었고 지금은 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다. 3학년 때에는 다르게 배우는 지 모르겠다만, 난 3학년을 경험하지 않았으니 나와는 관계없다.
친구들이 고등학교 3학년일 때에는, 난 자타공인 프로게이머였다( 정확히는 연습생이지만,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중학교 3학년 때 이미 동네 PC방에서의 난, 스타 크래프트를 신동처럼 잘하는 "스타"였다. 래더 100승 기념으로 큰 사발에 든 튀김 우동을 피씨방 사장님 쏴 준 게 중3 겨울 방학 때였다. 스타 생활 3년만인 고등학교 2학년 때 모 게임 프로 구단에서 battle.net 을 통해 연락을 해 왔을 땐, 대학 나오고도 집에 와서 놀고 있는 누나를 볼 때 내 적성엔 이게 더 맞겠다 싶어서 무작정 상경했다. 부모님 가슴엔 피멍이 맺혔겠지만, 성공해서 임요환처럼 유명해지면 그 멍도 풀리려니 하며 애써 외면하고 편지 한 장 달랑 써서 경대 위에 두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임요환도 처음엔 부모님 반대가 만만치 않았을 게, 안 봐도 리플레이였는데 알고 보니 홀어머니여서 좀 미안했다.)
처음 프로게이머가 되었을 땐, 생각보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남들은 1평 반 남짓의 잠자리를 빙자한 개인 공간, 15시간 이상의 게임 연습, 외출을 하려면 허락을 받아야 하는 숙소 생활이 노예생활이라며 힘들어 했지만, 낯선 서울에선 어짜피 갈 곳도 없는데, 밥 세 끼 주고 게임만 할 수 있는 그 곳이 나에겐 맞춤형 공간이었다. 배틀넷에서 써 먹던 전략이 아직 노출되기 전이어서 승률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감독님도 1년 정도 연습하면 1군으로 갈 수 있다고 격려도 해 주곤 했고, 그 때마다 주먹 불끈 쥐고는 개인리그 우승하는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내가 아직 이루기 전이었지만, 절대 멀리 있는 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뭔가 잘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1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스폰서에만 의존하여 다른 수익 구조를 찾지 못하는 게임 시장이 흔들리는 것도 그 때부터였다고 한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승보다 패가 많아져서 이상하게 승률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예전엔 자신 있던 map / 종족 할 것 없이 일주일 동안의 전적이 거의 전패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나보다 늦게 게임단에 들어온 동생들에게 밀리는 것은 부지기수였고, 이제 퇴물로 전락한 형들도 나를 자기 기 살리기 위한 게임 상대로 찾는 일이 잦아졌다. 어쩌다가 승률이 좋아질 때도 있었지만, 1군 선발 전 등의 중요한 경기에서는 젠장맞게도 거의 전패를 찍어줬다.
게임이 잘 풀리지 않자, 나에겐 맞춤형 공간이었던 숙소가 답답해 지기 시작했고, 총무형을 속이고 외박을 하거나 술을 먹는 일이 잦아졌다. 게임을 잊고 새로운 것을 해 보면 도움이 되려니 했었지만, 새로운 시도는 다른 새로운 시도를 위한 조그만 용기를 갖는 데만 도움이 되었을 뿐, 성적은 좋아지지 않았다(계속을 바닥을 찍고 있었으므로, 더 나빠질 게 없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던 중, 총무형이 잠든 새벽에 창문 타고 나가서 숙소의 동네에 있는 PC방에서 (내가 도망쳐봤자 PC방이다.) 채팅 따위를 하고 있을 때 알게 된 형이, 지금과 같은 생활에서 나아지진 않겠지만 대신 매달 200만원을 주겠다고 꼬셔서 온 곳이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이다. 개인 리그 우승을 하는 꿈을 꿨었지만, 결국 방송 경기 한 번 해 보지 못한 채 지금 생활을 하게 되어 버렸다. 시골의 집을 떠날 때에는 엄마 경대에 편지라도 쓰고 왔지만, 여기에 올 때엔 숙소에 기별조차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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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순이는 손이 참 예쁜 아이였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분명 경기도로 분류되는 곳에 학교를 다니면서, 나에겐 지잡(지방 잡대)에 다닌다고 해서 나를 놀래킨 친구다. 언제부터 경기도가 지방으로 통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순이가 하는 말은 다 맞는 것 같아서 부정하지 않았다. 하루에 20번 연습게임을 해서 19번을 진 날, 숙소에서 도망쳐서 PC방에 갔는데 그 날 새벽 알바를 뛰는 미순이를 처음 보았다. 원래 여자애들은 야간~새벽엔 알바로 잘 쓰지 않는데 그 날 새벽 알바로 오기로 한 애가 사정이 있어서 못 온다고 하니, 사장은 간단히 오후 알바였던 미순이의 근무시간을 새벽까지 쭉 늘려 버렸던 날이었다.
그 날, 낮에 19번이나 진 게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아서 속이 계속 미식거렸는데, PC방의 담배 연기가 더욱 나를 못 살게 만들더니 끝내는 화장실에서 변기를 잡고 배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야만 했다. 한 참을 우웩우웩 대고 얼굴을 들어보니 머리가 띵했는데, 다시 고개를 숙여보니 화장실 안이 난리가 아니었다. 그냥 모른 척하고 나올까 하다가 내가 저지른 게 미안해서 바닥의 음식물이었던 것을 휴지로 집어서 다시 변기에 넣고, 서 있는 대걸레로 바닥과 변기를 대충 닦고 나왔다. PC방 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손이 하나 휙 나와서 깜짝 놀랐다. 다시 보니, 내 자리엔 율무차가 든 종이컵이 놓여 있었고, 다시 또 보니 미순이가 예쁜 손을 숨기면서 서 있었다.
“고마워서요.”
“…네?”
듣고 보니, 내가 들어가기 전보다 더 깨끗해져서 인수인계 시간에 청소할 필요가 없어졌다나? 토하러 들어갈 때도 결코 깨끗한 느낌은 없었는데…
(하에서 이어 집니다.)
친구들이 고등학교 3학년일 때에는, 난 자타공인 프로게이머였다( 정확히는 연습생이지만,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중학교 3학년 때 이미 동네 PC방에서의 난, 스타 크래프트를 신동처럼 잘하는 "스타"였다. 래더 100승 기념으로 큰 사발에 든 튀김 우동을 피씨방 사장님 쏴 준 게 중3 겨울 방학 때였다. 스타 생활 3년만인 고등학교 2학년 때 모 게임 프로 구단에서 battle.net 을 통해 연락을 해 왔을 땐, 대학 나오고도 집에 와서 놀고 있는 누나를 볼 때 내 적성엔 이게 더 맞겠다 싶어서 무작정 상경했다. 부모님 가슴엔 피멍이 맺혔겠지만, 성공해서 임요환처럼 유명해지면 그 멍도 풀리려니 하며 애써 외면하고 편지 한 장 달랑 써서 경대 위에 두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임요환도 처음엔 부모님 반대가 만만치 않았을 게, 안 봐도 리플레이였는데 알고 보니 홀어머니여서 좀 미안했다.)
처음 프로게이머가 되었을 땐, 생각보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남들은 1평 반 남짓의 잠자리를 빙자한 개인 공간, 15시간 이상의 게임 연습, 외출을 하려면 허락을 받아야 하는 숙소 생활이 노예생활이라며 힘들어 했지만, 낯선 서울에선 어짜피 갈 곳도 없는데, 밥 세 끼 주고 게임만 할 수 있는 그 곳이 나에겐 맞춤형 공간이었다. 배틀넷에서 써 먹던 전략이 아직 노출되기 전이어서 승률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감독님도 1년 정도 연습하면 1군으로 갈 수 있다고 격려도 해 주곤 했고, 그 때마다 주먹 불끈 쥐고는 개인리그 우승하는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내가 아직 이루기 전이었지만, 절대 멀리 있는 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뭔가 잘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1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스폰서에만 의존하여 다른 수익 구조를 찾지 못하는 게임 시장이 흔들리는 것도 그 때부터였다고 한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승보다 패가 많아져서 이상하게 승률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예전엔 자신 있던 map / 종족 할 것 없이 일주일 동안의 전적이 거의 전패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나보다 늦게 게임단에 들어온 동생들에게 밀리는 것은 부지기수였고, 이제 퇴물로 전락한 형들도 나를 자기 기 살리기 위한 게임 상대로 찾는 일이 잦아졌다. 어쩌다가 승률이 좋아질 때도 있었지만, 1군 선발 전 등의 중요한 경기에서는 젠장맞게도 거의 전패를 찍어줬다.
게임이 잘 풀리지 않자, 나에겐 맞춤형 공간이었던 숙소가 답답해 지기 시작했고, 총무형을 속이고 외박을 하거나 술을 먹는 일이 잦아졌다. 게임을 잊고 새로운 것을 해 보면 도움이 되려니 했었지만, 새로운 시도는 다른 새로운 시도를 위한 조그만 용기를 갖는 데만 도움이 되었을 뿐, 성적은 좋아지지 않았다(계속을 바닥을 찍고 있었으므로, 더 나빠질 게 없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던 중, 총무형이 잠든 새벽에 창문 타고 나가서 숙소의 동네에 있는 PC방에서 (내가 도망쳐봤자 PC방이다.) 채팅 따위를 하고 있을 때 알게 된 형이, 지금과 같은 생활에서 나아지진 않겠지만 대신 매달 200만원을 주겠다고 꼬셔서 온 곳이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이다. 개인 리그 우승을 하는 꿈을 꿨었지만, 결국 방송 경기 한 번 해 보지 못한 채 지금 생활을 하게 되어 버렸다. 시골의 집을 떠날 때에는 엄마 경대에 편지라도 쓰고 왔지만, 여기에 올 때엔 숙소에 기별조차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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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순이는 손이 참 예쁜 아이였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분명 경기도로 분류되는 곳에 학교를 다니면서, 나에겐 지잡(지방 잡대)에 다닌다고 해서 나를 놀래킨 친구다. 언제부터 경기도가 지방으로 통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순이가 하는 말은 다 맞는 것 같아서 부정하지 않았다. 하루에 20번 연습게임을 해서 19번을 진 날, 숙소에서 도망쳐서 PC방에 갔는데 그 날 새벽 알바를 뛰는 미순이를 처음 보았다. 원래 여자애들은 야간~새벽엔 알바로 잘 쓰지 않는데 그 날 새벽 알바로 오기로 한 애가 사정이 있어서 못 온다고 하니, 사장은 간단히 오후 알바였던 미순이의 근무시간을 새벽까지 쭉 늘려 버렸던 날이었다.
그 날, 낮에 19번이나 진 게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아서 속이 계속 미식거렸는데, PC방의 담배 연기가 더욱 나를 못 살게 만들더니 끝내는 화장실에서 변기를 잡고 배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야만 했다. 한 참을 우웩우웩 대고 얼굴을 들어보니 머리가 띵했는데, 다시 고개를 숙여보니 화장실 안이 난리가 아니었다. 그냥 모른 척하고 나올까 하다가 내가 저지른 게 미안해서 바닥의 음식물이었던 것을 휴지로 집어서 다시 변기에 넣고, 서 있는 대걸레로 바닥과 변기를 대충 닦고 나왔다. PC방 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손이 하나 휙 나와서 깜짝 놀랐다. 다시 보니, 내 자리엔 율무차가 든 종이컵이 놓여 있었고, 다시 또 보니 미순이가 예쁜 손을 숨기면서 서 있었다.
“고마워서요.”
“…네?”
듣고 보니, 내가 들어가기 전보다 더 깨끗해져서 인수인계 시간에 청소할 필요가 없어졌다나? 토하러 들어갈 때도 결코 깨끗한 느낌은 없었는데…
(하에서 이어 집니다.)
젠장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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