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알아도 별 도움은 안 되지만, 가끔은 재밌는 것들이 있지. - 붉은 여단


3. 붉은 여단 (Brigate Rosse)



- 헌터 X 헌터라는 만화가 있습죠.

토가시 요시히로라는 작가의 작품입니다. 아직 연재 중이어서 대강의 줄거리를 말씀드릴 생각은 없구요. 찾아서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구요. 한 때 일본 주간 만화 잡지를 들었다가 놓은 유유백서의 작가가 그리고 있는 만화라는 정도만 말하고 싶구요.
만일 누군가와 곤과 키르아, 키메라 앤트, 넨 능력 따위에 대해 얘기를 하게 된다면 한 나절 정도는 기분 좋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 만화를 읽다 보면, 환영여단(幻影旅團)이라는 친구들이 나옵니다.

                 
(각각의 이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왼쪽 상단의 이마에 십자가를 박은 친구가 리더, 클로로.)

지들끼리 돌아다니며 못된 짓 하는 놈들인데, 얘네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머리 아픈 일이니 일단 넘어가겠습니다. 다른 Blog들을 조금만 찾아보시면 오덕들이 개별 단원의 능력치를  리스트하고 쟤네랑 누구랑 싸우면 어떻게 되는 지에 대한 덕질들을 차고 넘치게 잘 해놔서 굳이 제가 덧붙일 필요가 전혀 없을 것 같네요. (이 포스트는 Hunter pedia라는 site를 많이 참조 했습니다.) 나쁜 놈들인 주제에 이 만화 안에서 꽤 인기가 있는 캐릭터들이라는 것 정도만 말씀 드리죠.

 제가 만화를 읽어가면서 궁금했던 건, 13명의 쌈 잘하는 친구들을 모아서 저자는 왜 하필 "여단"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였는데요, (幻影旅團에서 환영은 환상할 때 '환'에 그림자 '영'을 붙여서 Ghost 혹은 Phantom이란 뜻이니 뭐 지들이 신출귀몰하다 그런 의미겠죠.)

여단은 군대용어로 대대보다 조금 크고 연대보다 조금 작은 단위를 부르는 말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겨우 13명으로 여단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게 어색했거든요. wiki를 통해 좀 더 자세하게 알아 본 결과로는, 일반적으로 사단의 하위 개념으로 연대보다 조금 작거나 같은 규모이고 독립적인 부대 특성을 갖고 있는 단위를 주로 일컫는 것 같습니다. NATO에서는 3200~5500명 규모이고 스위스나 오스트리아는 11,000명 규모까지 커진다고도 하고요. 하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요런 소수 정예의 특공대에 여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찾기 어려웠습니다...만,



조금만 생각해 보니 있더군요. 그것도 환영여단이라는 놈들과 아주 잘 어울리는 것으로요.





- 붉은 여단. Red Brigades, Brigate Rosse. BR.

제가 왜 환영여단이 붉은 여단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는 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조금 미뤄두겠습니다. 먼저 붉은 여단에 대해서 잠깐 얘기를 해 보죠.


(아주 붉네. 붉어.)



일단 깃발부터 중공기마냥 아주 붉은 게, 냉전 당시 지구의 절반을 물들였던 공산/사회 주의 냄새가 물씬 납니다. (대개의 경우 붉은 색은 공산/사회 주의를 뜻하는데 딱 두 나라에서만 보수주의 당이 이 색깔을 자신의 identity로 사용합니다. 미국의 공화당과 한국의 새누리당이죠.)

1970년 개띠해에 이탈리아 Trento 대학의 사회주의 학생회 동아리로 시작한 이 전위적 막시스트 테러단체는 이탈리아에서 자본주의와 파시즘 그리고 미국적 사회구조를 몰아내는 방법으로 납치(kidnapping)/사보타지(Sabotage)/은행털기(robbery)를 선택합니다.

활동 초기엔 공장 라인에 깽판 놓는 정도로 시작하던 것이, 1972년엔 첫 납치를, 1974년엔 첫 살인을 시전해 버리게 되는데, 창립자이자 리더 그룹인 Crucio와 Franceschini가 체포되어 18년 콩밥취식 선고를 받게 되면서 비로소(?) 유명세를 얻게 됩니다.
나쁜 게 미디어에 나오면 애들 따라할까봐 겁나는 건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여서 지도부가 체포되었던 그 해 이후인 1975년부터는 얘네들의 활동 반경도 넓어지고 (밀라노 근처에서 놀던 애들이 로마와 베니스로 진출합니다.) 멤버도 급격히 늘어나서 더욱 다양하고 강도 높은 테러를 저지르기 시작하거든요.

1975년 이후를 (굳이 나누자면) 지도부가 교체된 붉은 여단의 2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때 붉은 여단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최고의 사건(결과적으로는 최고의 닭짓이 되어 버린.), Aldo Moro 납치 사건을 저지르게 됩니다.
붉은 여단 2기를 이끌고 있던 마리오 모레티는 당시 이탈리아의 기독 민주당 당수이자 39대 총리였던 Aldo Moro를 납치하여 당시에 구금중이던 동료의 석방을 조건으로 정부와 딜을 시작합니다. Moro는 기독 민주당과 기타 군소의 진보주의 정당을 묶어서 연합정부를 구성하려고 하였는데, 붉은 여단에서는 그러한 시도를 "인민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여 연합 정부 구성을 위한 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Moro를 납치했더랬죠.

정부에서는 이 납치 사건에 대해 "테러리스트와 협상은 불가"라는 초강경 입장을 끝까지 고수 (Moro에게 친필 편지를 작성하게 해서 가족과 정부, 심지어 교황에게까지 보내는 등의 여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요...) 하였고,  54일 동안 인질을 구금하고 있던 여단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총리를 차 트렁크에 들어가게 하고 담요로 덮어 놓고는 총으로 쏴서 죽여 버립니다. 시체를 넣은 차를 기독민주당 사무실과 공산당 사무실의 지리적으로 중간 지점에 둠으로써 상징적 의미를 애써 부여하려고도 했고요.

붉은 여단은 자신들의 이러한 살인 행위가 사람들의 (최소한 공산주의자들에게서 만이더라도) 지지를 받을 것으로 예상하였지만, 이 사건은 오히려 이탈리아 전체에 anti terrorism / anti Brigades 현상이 확산되게 되는 계기가 되어 버립니다. 붉은 여단은 음/양으로 받던 외부 지원이 모두 끊기게 되어 점차 궁지에 몰리기 시작하고요.
경찰에 체포된 마리오 모레티는 재판에서 6번의 무기형을 받았고 (어마어마한 선고에 비해 고작 15년을 살고는 가석방됩니다. 이 가석방 때문에 붉은 여단이 극우 단체의 사주를 받았다는니, 모레티는 극우의 쁘락치라느니 하는 견해가 나오기도 합니다.) 나머지 단원들은 경찰에 쫓겨서 해외로 도피하거나 투옥됩니다. 84년 정도까지는 남은 단원들이 지 버릇 못 주고 납치/살인 등을 저지르다가 1988년 지도부의 대거 체포 이후에 거의 와해 됩니다.

근 이십년 가까이 한 활동을 통해 극좌파 테러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붉은 여단은 아직도 이탈리아에서는 테러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단어로 쓰입니다. 작년에 발생한 올가 네클레우스의 테러도 붉은 여단의 잔존 세력으로 추정하는 (정치적으로 꽤 유력한)사람들도 있구요.





- 환영여단 VS. 붉은 여단

이제 토가시 요시히로의 작명 센스에 감탄할 차례입니다. 일본 만화계의 경우 인문학/역사학 등에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는 작가들이 많아서 주인공, 단체 등의 이름을 지을 때 실제 역사에서 차용하는 경우가 많긴 합니다. 대표적으로 1980년대를 씹어 드신 기동전사 건담은 2편(마크 2가 나오는 2편입니다.)에서 반란군을 그대로 "레지스탕스"라는 이름으로 등장시키는데 애들 보는 만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담한 센스입니다.  앞서 포스트했던 베르세르크는 고대와 중세 유럽과 아시아의 역사 및 언어적 요소를 그대로 가져와서 한 개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버리기도 하구요.


헌터X헌터로 다시 돌아 옵니다. 환영 여단의 멤버 숫자인 13이라는 수는 얼핏보면 기독교를 연상시킵니다. 예수와 12제자죠. 하필 리더는 이마에 역십자를 그리고 있고, 전투를 할 때는 (마치 성경처럼 보이는, 하지만 책이름은 도적의 극의.) 책을 손에 듭니다.


(가운데 앞에 있는 놈이 대장 클로로. 책을 들고 있는 게 성직자 같아 보이지만,
 FULL NAME이 Chrollo Lucifer인게 함정임. 악마 새끼임.)

이쯤되면 쉽게 떠오르는 이 깡패조직의 이름은 "악마의 사도들" 정도가 될 텐데 이건 뭔가 좀 쉽죠. (에반게리온의 '사도'가 생각나기도 하구요.) 성경에서 따온 듯한 이 조직의 형태 보다는 이 조직이 어떤 짓을 하는 지에 초점을 맞추어 이름을 짓지 않았을까 하는게 제 생각인데요.


도대체 만화 안에서 환영여단이란 놈들이 어떤 놈들이며 어떤 짓을 하고 다녔는 지를 살펴 보자면,

1. 환영여단은 전세계에서 버려진 쓰레기더미를 품고 사는 유성가에서 발생합니다. 유성가의 사람들은 일반의 세계에서 격리되고 소외된 사람들이죠. 그 속에서 환영여단이라는 소수의 정예가 일어나서 전 세계를 상대로 나쁜 짓을 벌입니다.

2. 만화에서 환영여단이 저지르는 첫번째 범죄는 Robbery 입니다. 드림 옥션이라는 경매에서 경매장에 나온 모든 경매품을 훔치는 걸 시도하고 경매장에 있던 사람들은 저 세상으로 보내 버립니다.

3. 환영여단 에피소드를 이어나가는 핵심적인 스토리는 바로 납치입니다. 여단의 멤버이자 지구 최강의 물리력을 가진 우보긴이 one of  주인공인 크라피카에게 납치 당하는 이벤트로 시작해서, 곤과 키르아(만화 전체의 주인공입니다.)가 여단에 잡혀서 감금당하기도 하고,  여단의 보스인 클로로가 주인공 들에게 넨(念)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면서 납치되기도 합니다. (납치 이후에 당연히 발생하는 협상 과정과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는 아주 탁월한 수준입니다.) 어찌보면 단행본의 5권 정도에 해당하는 환영여단 에피소드는 납치로 시작해서 납치로 끝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이 정도 말씀 드리면 슬슬 감이 오시리라 생각됩니다. 환영여단이 벌이는 짓은 붉은 여단이 하는 짓과 행태적인 면에서 매우 비슷하거든요. 한 마디로 테러 (납치/절도)죠. 좀 더 가 보겠습니다.


4. 만화 안에서, 드림 옥션이라는 경매를 열어서 경매품을 판매하는 수익을 차지하는 집단은, 생각할 수 있는 수 많은 범죄 조직 중 하필  "마피아"인데요, 환영여단은 이 마피아를 상대로 도둑질을 해 버리고 급기야는 마피아 전체를 거의 괴멸에 이르도록 만듭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 마피아는 현실의 세계에서 "이탈리아"의 갱조직이죠. 

5. 이 납치 에피소드들의 마지막은, 파크노다라는 여단의 멤버가 죽는 것으로 끝납니다. 상대방의 기억을 훔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 멤버는 에피소드 내에서 단 한 번의 환복 없이 깔끔한 정장만을 입고 나오고,무기로 리볼버를 들고 다닙니다. 얼굴 모양은 프랑스나 이탈리아계처럼 보이고요.

(요렇게 생겼고, 이렇게만 입고 다닙니다.)

크라피카가 보스인 클로로를 납치 했을 때, 여단에게 잡혀있던 곤과 키르아를 클로로와 교환하기 위해 크라피카가 단 한 명의 여단 단원을 부르는데 그 때 부른 단원이 파크노다 입니다. 파크노다는 인질 교환의 조건을 성립시키는 대신 (나쁜 놈인 주제에 비장하게도)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 여단 단원들에게 크라피카의 존재를 알려 주게 되는데, 그 죽기 전의 마지막 모습이,




이렇거든요.... 근데 이 장면은 자꾸 저에게 아래의 사진을 연상 시킵니다.




납치되었던 Aldo Moro 총리가 총에 맞아 살해당하기 전에 여단 단원들이 찍은 사진인데, 파크노다의 마지막 장면과 얼굴 각, 어깨 각, 눈과 코, 다문 입의 모양새 등에서 묘하게 분위기가 닮았죠....





- 차용 그리고 해석의 즐거움

사실, 위의 제가 언급한 내용들은 모두 억측으로 치부해 버려도 될 만한 것들입니다. 괜히 이것저것 껴서 갖다 붙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언급된 내용 중 특히 5번이 그렇죠...) 검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작가에게 "환영여단 스토리를 구상할 때 붉은 여단을 참고했느냐"라고 물어보는 것이겠지만, 제 스스로 상상하는 기쁨이 날아갈까봐 못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만화를 보는 도중에 머리속에 흩어져 있던 짧은 스키마들이 사이다 캔을 땄을 때 올라오는 방울마냥 퐁퐁 터지듯이 떠오르는 즐거움을 제가 느꼈다는 점이죠. 아직 만화는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인 울 나라 사회에서는 이런 만화를 찾아 보기 어려운 것이 많이 아쉽기도 하구요.

만일, 실제로 작가가 붉은 여단의 내용을 이 만화에서 녹아 내어 재 탄생 시켰다면 정말 대단하다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심하게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진수의 삼국지가 나관중의 삼국 연의로 탈바꿈되는 것이나, 댄 브라운의 소설들이 일루미네티나 장미 십자 기사단을 소재로 소설을 쓰는 것과 비슷해 보이는데, 형식적으로는 이 작가의 방식이 더욱 뛰어난 것 같습니다. 역사적인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픽션을 만드는 전자에 비해, 팩트를 차용하되 직접드러내지 않고 기존의 등장인물들에 더해내는 게 더 어려워 보여서 말이죠.





아직 이 만화는 연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작가가 매너리즘을 느꼈던 동안은 휴재가 되기도 했지만 작년 말에 후속편이 나와서 이 후의 연재를 잔뜩 기다리게 됩니다. 저의 스키마를 바닥까지 훑어 주기를 기대 하면서 말이죠.








- 다 쓰고 나니 제목을 붉은 여단이라고 붙여서 이에 대한 소개하는 포스팅처럼 보이는데 내용은 만화에 대한 칭찬이 되어 버렸네요. 제목을 처음 잡으면 이래서 안 되는 모양입니다만, 귀찮아서 안 바꾸겠습니다.

- 환영여단의 보스의 이름을 일본어 독음으로는 크로로가 맞는데 Hunterpeida에 있는 영어 독음은 "크롤로"이더군요. 이건 그냥 만화책 상의 이름인 클로로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또 Hunterpedia에서는 환영여단을 Phantom Troupe으로 번역했던데 이 부분은 좀 아쉬웠구요.

댓글

  1. 헉,,검색중 우연히 들르게 되었는데요, 취향이 저랑 너무 비슷해서
    실제로 함 만나뵙고 싶었지만 포스팅 중간에 쓰여진 다섯살 아들내미라는 흔적을 보고 눈물 조금 훔치다 갑니다...(크흡)
    좋은 글도 많고 덕분에 즐거운 시간보낼 수 있을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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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잘 읽어 주셨다니 제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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