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거미의 이치 - 京極夏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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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오랜만에 글을 쓰는 것에 대한 감상을 아래와 같이 밝힌다. "2014년 난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그 동안 많은 것을 잃었다." 무당거미의 이치 - 京極夏彦 (교고쿠 나쓰히코 혹은 나츠히꼬. 뭐든 상관 없다.) 원래 "알아도 별 도움은 안 되지만, 가끔은 재밌는 것들이 있지"의 시리즈로 경극하언 선생에 대한 얘기를 풀어볼 예정이었으나, 이런 놀라운 작품은 따로 떼어 포스팅을 해야 마땅하다. (교고쿠 나츠히꼬에 대한 긴 얘기를 쓰기 귀찮아서 그러는 건 아니...) 작가 본인이야 백귀야행 시리즈라고 줄기차게 주장하나, 다들(심지어 출판사 조차도) 교고쿠도 시리즈로 알고 있는 일련의 작품 중 5번째, "무당 거미의 이치"는 그간 (혹은 최소한) 한국에 정발되어 세간에 알려진 작품 중에 최고로 뽑을만 하다. 최소한 나에게만은 그렇다. 2004년 교고쿠도 시리즈의 첫 작품을 접했을 때 느꼈던 긴박함/새로움(두 느낌을 줄이면 신박함인가?)/아찔함/이 새 작품이 나올 때마다 사인커브 (우부메의 여름이 빅히트였으니 코사인 커브인가?) 를 그리면서 변하다가, 이 책에 이르러서 커브의 최고점에 다다른 느낌이다. 책을 열자마자 추젠지로 의심되는 검은 옷의 남자와 "거미"로 지칭되는 여자의 대화가 나오는 걸 보고, "아, 이 양반 추리력의 약발이 떨어지니 이젠 시간 구성을 꼬았나?"란 의문이 들었으나... 마지막까지 다 읽은 후엔 "죄송합니다, 센세. 제가 감히 당신을 의심했습니다."란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실제로 조용한 방에서 무릎을 꿇고 조아릴 뻔 했다.) 추리력이 떨어지기는 개뿔, 이전의 작품들에서도 빛났던 미스테리를 이어가는 힘은 계속 찬란하게 빛을 발했고, 망량의 상자 이후로 자주 사용하던 두 가지 사건의 병행 및 교차 구성, 사건이 사건 밖으로 튀어나오는 액자 구성은 더욱

봄 플레이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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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어지럽고 원치않는 빠름을 강요 당할 때에는, 뜨는 해와 지는 해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한적한 곳에서 빈둥거리면서, 커피나 팬케이크 따위만 입에 물고 하루 종일 노래나 듣고 책이나 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새 날이 갑자기 따듯해지면서 그런 생각이 더 자주 드네요. 묶인 몸은 그대로 두고, 고막과 세반고리관과 청신경만이라도 그런 휴가를 보내 봅시다. 고문이 될 지, 휴식이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Fire and Soul - Cranberries http://youtu.be/r5sSEi3JovI (이제 댁들도 늙었구랴. 특히 돌로레스 오라이어던 누님은...) 90년대 중반에 Dreams / Ode to my family / Linger 등으로 한국에서도 꽤 인기가 있었던 아이리쉬 밴드인 크랜베리스는 2003년에 해체하고 멤버들 각자 살 길 찾아 살다가, 2009년에 다시 모여 재결합하고 유럽 / 미국 투어를 시작, 2012년에는 새 앨범을 떡하고 내어 놓는데, 지금 소개하는 Fire and Soul이 그 앨범(Rose)에 수록된 곡입니다. 느낌은 1994년의 크랜베리스로 완전히 돌아온 느낌이네요. 오래된 연식이 묻어나는 외모와는 반대로, 돌로레스 누님의 목소리는 하나도 늙지 않았고 마이크 호건의 기타 리프 느낌도 친숙합니다. 몽환적인 가사나 의미없는 허밍같은 후렴구도 변하지 않았네요. (1996년 한국의 주주클럽이라는 밴드가 지금 말한 '의미없는 허밍같은 후렴구'와 기타 리프, 돌로레스의 창법을 그대로 따라한 적이 있었죠. 표절 시비 이후 지금은 뭐 하는 지 모르겠지만.) 듣다 보면... I'll take you to my grave. 널 영원히 기다릴거야, 널 내 무덤으로 데려갈꺼야... 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이게 연인의 속삭임인지, 지옥에서 기다리는 악마의 독백인지 헷갈립니다. 왠지 전체적인 느낌이나 돌로레스 아줌마의 목소리로 판단하자면 후자겠죠. 아마. (세일러 마스의

Spring has come.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다시 낮이 되듯, 자연스레 봄이 와 버렸어. 그런데, 날이 따뜻해진다고, 낮이 점점 길어진다고, 두꺼운 옷 입고 전철타면 이마에 땀 난다고, 봄이 오는 건 아닌 것 같아. 옷장에 쌓여 있는 두툼한 스웨터들 마냥 아직 춥고 외로운 겨울은 꿈적도 안 하고 있거든. 읽고 있는 책들을 모두 물리학같은 딱딱한 책들로 바꿨는데도, 아직도 맘 속엔 몰캉한 예쁜 말들만 떠오르고, 글을 쓰면 허공에 쏘는 산탄총이 과녁을 맞추지 못해서 아주 지랄을 하고 있어. 다시 말하지만, 네가 와야 봄이야. 드러내고 이렇게 아플 바에야, 차라리 끝까지 모른 척 할 것을.

Keyboard

검은 플라스틱 판에, 누르면 글자가 나오는 단추들이 늘어서 있는 기계 하나가, 사람을 이렇게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걸 알게해 준, 후배들에게 사랑과 감사를 표합니다. 2014년에도 여러 만남을 통해 늘 함께할 수 있기를, 마음을 다해 바래 봅니다.

행복한 책읽기 - 김현 (문학과 지성사, 1993)

며칠 전부터 재밌게 읽고 있는 책이 있어서, 그대로 옮겨본다. 작고하신 분의 허락을 구할 방법을 몰라 일단 그대로 베껴쓰고 출전을 밝힌다. 1986.9.21 천일야화에 나오는 숱한 노래들은 아라비아의 시적 수준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별이나 사랑의 시들은 특히 뛰어 나다. 그대 떠난 후 단잠을 맛보았다면, 원컨대 신이시여, 은총을 끊으시라. 그렇다, 이별한 후 한번도 나의 눈은 감겨지지 않고, 이별한 후 편안히 쉰 적도 없었네! 그대는 나의 꿈 보았는지 아, 원컨대, 밤의 꿈아 생시에 나타나거라. 그리운 것은 밤의 휴식 잠든다면, 그리운 그대 모습 꿈에 보건만 잠이 들면 꿈속에서나마 그대의 모습을 볼 터인데, 잠도 오지 않는다는 비통한 탄식은 뛰어난 호소력을 갖고 있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라는 황진이의 시나, 한용운의 이별 노래와 맞설 만하다. 9.30 미국 영화가 자꾸만 애국심을 강조하는 것은, 미국의 지접 힘이 자신감을 일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자기 나라가 좋은 나라라는 것을 선전해야만 안심이 되는 나라는 이미 그렇게 좋은 나라가 아니다. 자기 나라가 좋지 않은 나라라고 비판하는 것을 그대로 놔두고 그것을 수용하는 나라가 차라리 좋은 나라이다. 그 체제를 나는 '부정적 신학'이라는 용어를 차용하여 '부정적 체제'라고 부르고 싶다. 12.28 <전략> '미래시' 동인지 10집 <존재와 언어> (융성출판사, 1986)에는 좋은 시들이 많지 않다. 동인들의 시의 수준은 그저 그렇고, 거기에 초대된 김영태의 <눈화장>은 아름답다. 그의 시적 자질이 자유분방한 대상 묘사에 있음을 이제 확연히 알겠다. 아이 섀도를 칠한 달이 뜬 추석 대보름 눈두덩이 푸르스럼한 아니, 요즘 십대들은 엷은 자색을 눈가에 바르지 아이라인으로 근 다음 뭉개 번지도록 눈화장을 하고 하늘

천자문 후기

천자문 후기. 1. 위진남북조는 짧은 시기에 왕권이 마구 왔다갔다 한 혼란한 시기였으나, 문화는 꽃을 피웠다. 건안칠자 중 조조/조식은 사실상 중국의 시를 정립했다고 볼 수 있다. 죽림칠현으로 알려진 혜강은 유명한 <성무애락론 - 음악을 들을 때 이치가 감정보다 더욱 중요하다... 뭐 그런 뜻. 나쁜 음악 들으면 사탄의 꾀임에 넘어간다는 아지매들이나 게임의 폭력성을 알아보기 위해 전기를 내리는 기자는, 제발 이런 책 좀 함 보시길.>을 집필했다. 왕희지의 글씨는 입 아프니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도교의 시조로 잘 알려진 오두미교도 삼국시대 한중에서 '장노'의 할아버지가 만들어낸다. 결론은 우리도 시기가 어려울 수록 더욱 덕질에 매진해야 겠다능. 2. 이 글의 처음에 쓸 때에는, 재미없는 곳에 떨어진 친구에게 재밌게 읽을 만한 거리를 주기 위해서였다. 원래 알고 있던 내용이었고, 조금만 생각을 다듬으면 될 것 같아 쉽게 쓸 거라 생각했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고, 한 달 정도가 지나서야 퇴고가 되지 않은 초안이 완성되었었었었더랬다. 곧 써 줄 것 마냥 큰소리 뻥뻥 쳤구만, 글은 나가지 않아서... 시간 내에 글쓰는 어려움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백수문'에 대한 글을 쓰다가 내 머리에 흰머리가 늘어난 게 함정. . 주흥사 형님, 고생했수. 1-1. 말한 김에 성무애락론에 대해서 한 마디. 혜강은 음악 자체는 형식적인 조화로움에 따른 아름다움 만이 있을 뿐이며, 그 자체에는 애락이 담겨있지 않다고 주장하여, "풍속을 바꾸는데는 음악만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유교의 가르침에 반박한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 좋은 사람이 되고, 나쁜 음악을 들으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음악, 소리라 할 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다른 감동을 주고, 다르게 받아들여 지기 때문에 음악에 목적성 따위야 인정할 것이 못된다고 주장했는데, 이게 3세기 사람의 주장이다. 서양에서

(4) 알아도 별 도움은 안 되지만, 가끔은 재밌는 것들이 있지. - 천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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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字.文. 두둥... 천자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땐,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가마솥엔 누룽지 박박 긁어서"로 외웠던 그 천자문입니다. 왜 "'땅 지' 라고 써 있는데 '따 지'"라고 읽냐고 물어봤다가 그냥 그렇게 읽는 거라고 타박이나 받았던, 이름 석자만 들어도 단원 김홍도의 서당 그림이 생각나는 그 천자문 입니다.   (단원 김홍도의 "서당" 그림이다. 요새 애들이 "천자문"하면 떠올리는 그림과는 사뭇 다를 거다.) 근데 왜 갑자기 천자문이냐고? Posting의 제목을 보시면 답이 나옵니다. 천자문 따위, 이 시대에서 알아도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알아두면 재미 있거든요. 1. 백수문 저나 너님들 주위의 아무도! 절대! 이렇게 부르고 있지 않지만, 천자문은 백수문 (白首文), 또는 백두문(白頭文)이라고도 불립니다. 천자문을 지어낸 사람은 남조 시대의 주흥사(절 이름 아니야. 출판사 이름 아니야.)라는 양반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양반이 천자문을 지어낸 후 엄청난 스트레스로 인해 하루 아침에 머리가 모두 백발이 되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그러네요. 심지어는 마지막 구를 지을 때에는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아 잠이 들었는데, 꿈에 귀신이 나타나 "위어조자 언재호야"라고 알려 줘서 간신히 마무리 했다는 얘기도 있구요. 글을 짓는 게 무슨 대수라고, 머리가 하얗게 되고 (원래 반백 쯤 되었는데, 흑발이 모두 빠져서 백발이 되었겠지. 원래 흰머리가 좀 더 강하게 마련이니...) 꿈에 귀신을 볼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를 알기 전에, 남조라는 시대의 양나라와 주흥사라는 사람에 대해 조금만 알아 보죠. '남조'라는 시대는 후한 이후에 이어지는 '위/진/ 남 북 조 /' 시대에서 보이는 ' 남조 '입니다. 잘 아

너 요새 좀 우울하다며? 퇴근길 playlist

1. Blurred Lines - Robin Thicke  첫 곡이니 상큼하게 Robin Thicke으로 가 보자. 동명의 앨범은 (내 기준으론) 시망이나 요 노래 만큼은 2013년 하반기의 지구를 덮은 Blurred Lines. (앨범이 시망이라는 건 앨범 판매가 시망이었다는 건 아니고, 같이 들어 있는 곡들이 이 노래하고 Ain't no hat for that을 빼면 뭐 딱히 별로 들을 게 없다는...) 이 분, 77년생인 주제에 92년 생인 마일리 사이러스 언니하고 MVT Video music award 무대에서 한 바탕하셔서 (부럽...) 무려 관련 360,000 twit을 이끌어 내셨지. 음... 사이러스 언니 얘기는 좀 있다가 나오니 여기선 참아보고. 2. Give Life Back to music - Daft Punk 2013 하반기를 Robin Thicke이 덮었다면, 전반기는 단연코 Daft Punk라고 할 수 있어. (재밌는 건 Blurred Lines의 싱글 앨범이 Daft Punk의 Get Lucky 보다 한 달 정도 빨리 나왔다는 거.) Daft Punk의 Get Lucky나 Thicke의 Blurred Lines 모두 Pharrell이 피쳐링을 했으니 2013년의 진정한 승자는 Pharrell 일 수... 라고 생각하지만서도, 디스코 리듬과 리듬 기타가 아닐까 싶기도 해. 요 노래는 Nile Rogers 옹의 리듬 기타가 아주... 그냥... 확.. 그냥... 아오... 신나. 3. Good Times - Chic Nile Rogers 옹이 나왔으니, 시크한 Chic이 안 나올 수야 없지. Give Life Back to Music에 나오는 리듬 기타의 20년 전 Version을 한 번 들어보자고. 플레잉 타임이 좀 긴 건 함정. 요새야 노래하면 3분 30초짜리들이지만, 이 시절엔 뭐... 8분이야 우습지. 운전할 때 듣다보면, "어, 아직 이 노래야?" 할 때가 있을 지도 모르겠

사무라 히로아키 - 무한의 주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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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무한의 주인에 대한 글을 쓸 때에는 완결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는 게 스포일러가 되는 때였지만, 이제는 완결편의 한국어판이 나온지 석 달이 넘어가고, 그 완결에 대한 review도 이제는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남들이 한 얘기를 피해서 쓰는 글쓰기가 조금 더 어려워지긴 했지만, 원래 하려던 얘기는 아직 할 수 있을 것 같아, 늦었지만 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절대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라도 제목 옆에 있던 (1)이라는 숫자 때문에 (2)편을 기다리셨던 분이 계셨다면,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단일 게시물이 1,500 view가 넘어갈 줄은 저도 몰랐거든요. -_-;;) 3. Irreversible (모니카 벨루치 누님의 당당한 뒷자태... 라고 하고 싶으나, 저 장면 뒤에 벌어지는 일은 기울어진 프레임이 암시하듯 매우 참혹하다.) - 열역학의 제 2법칙인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깨지지 않는 우주에서는, "시간"이 방향성을 잃지 않고 한 쪽 방향으로만 이동하는 운동값을 갖게 됩니다. 상대성 이론에 따라, 빛의 속도가 중력권을 탈출할 수 있는 속도보다 느린 블랙홀 근처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0에 수렴할 수 있겠지만, 0의 뒤쪽으로 가지는, 즉 엔트로피가 감소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시공간 안에 제약을 받는 우리 모두는 "Irreversible" life를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죠. 이런 실제의 삶이 불만스러웠는지, 감독은 이 영화의 plot을 시간의 역순(reverse)으로 배치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배열이 시간이 어떻게 모든 것을 파괴하는 지 잘 보여주게 되는데요... (이 영화를 관통하는 Motif.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괘.한.다.   ) 모니카 벨루치 (영화의 모티프와는 반대로, 시간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걸 당분간 포기한 듯 보입니다. 매트릭스 리로디드에서 페르세포네 역을 하실 때 이미 우리 나이 39세였죠.) 는 인생에